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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또 9기 지원을 하면서 내 인생 돌아보기

Young_Metal 2023. 11. 13. 03:11

인생 그래프를 그리라면 난 이렇게 그릴 수 있다.


내 인생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최고점을 맞은 22살, 최저점을 맞은 26살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27살을 마무리하며 28살을 맞이하는 지금

글또 9기를 지원하며 미뤄왔던 내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을 갖고 글을 써내려가보겠다.

인과추론을 위해선 시간순으로 써야하지만, 독특하게 난 현재부터 과거를 돌아가고 싶다
지금의 결과가 맺어진 원인은 내가 기억하는 것에 대한것일테니, 결과를 보여주고 그 결과에 대한 원인을 독자 여러분이 추론해주시길..!

<현재> -  대학원 자퇴생, 취업준비생, 워홀준비생


23년 상반기 K digital training을 해보고 싶어서 프로그래머스 AI 데브코스 5기를 했었다.

원래는 네이버 AI 코스를 지원했지만 코테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가장 가까운 시일에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지원해서 약 5개월간 수업을 듣고 마지막 7월달은 한달 동안 Multimodal 모델로 에어비앤비 기반의 숙소 추천글을 작성해주는 웹서비스를 개발했다. 

23년 상반기까지만해도 대학원 휴학이었지만 2학기로 접어들면서 내가 수료 조건(논문 1개)도 못채웠다는 사실에 이건 대학원 걸어놀 필요가 없어져 자퇴를 신청했다. 

 

그렇게 아직도 밤마다 고민하게하고 아직도 아쉬우면서도 나를 아프게한 대학원을 보내주게 되었다. 

 

가짜연구소 7기 이니셔티브 빌더로 nn.labml.ai 페이지 번역, 오로카 제시카 모임에서 ROS2로 RC카를 만들고 AIxRobotics 운영진을 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소소한 세미나, 컨퍼런스 ,스터디들을 진행하면서 나름 바쁘게 지냈다. 

취업준비생 주제에 알고리즘이랑 트렌드에 따라 토이프로젝트만 진행해서 취업을 하고 싶은건가?라고 생각이 들게 살았다.

그렇지만  갭이어라고 생각하니 늦은 나이라는 건 없구나, 나중에 30대에 실패해도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마음을 다잡게 한 시간이 되었다. 


<26> - 방황과 랩 방출, 유럽 섬머 스쿨, 만도 인턴.... 그리고 호주!


내가 잘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하지 못하는 성격이, 혼자 고립되어 나만 잘못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대화를 시도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누가 끊어주지 않으면 먼저 끊지 못했던 랩실을 교수님이 먼저 나가라고 해서 나가게 되었다. 

그랬더니 원인을 알 수 없던 전신 두드러기, 심장의 짓눌림, 호흡곤란이 싹 가라앉았다. 종합병원같던 내 몸이 쌩쌩해졌고, 잠을 잘 못잤던 것이 오히려 이렇게 자도 되나 싶을 정도로 깊게 잘 수 있게 되었다. 

 

내 인생의 첫 실패를 맛보게 한 대학원은, 남들은 잘만 버티는 랩실 생활을, 석사는 할만하지 라는 그 석사를 나는 랩실을 나오게 됨으로서 실패를 인정하게 되었다. 

 

원인을 분석하자면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바라는 것을 바랄 수 없고, 그런 분위기를 인정할 수 없으면 같이 살 수 없는 내가 제일 잘 못인거 겠지 싶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하지만, 나는 그 도망이라도 쳐야 살아갈 수 있었다. 난 내 아픔을 말하지만 대학원을 나오게 되면서 대학원 친구는 나에게 연락하지 않기에 슬퍼하고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인간관계는 내가 잘나야 사람들이 나에게 붙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월 체코공과대학교에서 진행하는 드론 섬머 캠프를 다녀왔다. 유럽의 학풍은 너무나 자유로웠다. 여러 나라의 랩실이 서로 같이 일하고 이런 섬머스쿨에서 네트워킹을 중요시 여기며 학제간의 공유하는 분위기, 발표를 존중하며 질문하는 문화는 너무나 내가 바라왔던 이상향의 학계였다. 뭔가를 배우기보다 네트워킹하면서 내가 가진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시간이었다. 먼저 인사하고 먼저 질문하고 스몰토크를 하고 나의 링크드인을 알려주며 나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유럽의 학생들의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8월부터는 만도에서 AI 연구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 내가 바라왔던 회사는 랩실보다 다니기 너무 편했다. 주기적으로 이뤄지는 미팅과 교육 권장, 보장된 출퇴근시간 그리고 최저임금이지만 대학원 연구비보다 높은 월급, 판교로 출퇴근하면서 얻는 직장인들의 열정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구나를 느끼게 해주었다. 대학원 랩실에서는 천덕꾸러기에 실패작이었던 내가 내 과거의 열정과 인정을 무시받았던 내가 사실은 한 곳에서 그런거지 다른 곳에서는 내 과거의 노력이 인정받는 거라는 것을 배웠다. 나중에가서 이런 무시를 받았으면 더 이겨내지 못했을 것을 26살에 내가 겪었기 때문에 나를 칭찬하고 인정하는 분위기의 단체에 속해있는 것의 중요함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이것은 내 직업 가치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4년만에 호주로 갔다. 평화로운 분위기, 아침에 서핑하고 출근하는 삶,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보내고 휴가를 꼭 누려야하는 사람들, 시드니 정착해서 너무나 좋은 집에 회사를 다니는 친구, 선선한 날씨. 

내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단순한 데, 나는 복잡하게 살고 있구나. 내가 바라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보장이 없구나. 나는 햇빛을 맞으며 하늘을 볼 때 행복한 사람인데 이걸 모르고 계속 창문도 안들어오는 실험실에 쳐박혀있었구나를 다시금 깨달았다.

 

 

<25> - 대학원 진학, 삐그덕 삐그덕, 남의 떡이 커보인다?! 난 소통을 못하는 사람?!

대학원의 1년차 교수님 밑의 1기 학생으로 진학했다. 그 분야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과 열정보단, 시기가 시기라 취업이 안될거고 대학원 자체는 관심있었는데 젊은 교수님의 활력의 랩실이면 무조건 젊은 분위기일거 같아 신청했다. 아무것도 없는 실험실에서 무언가를 꼬물꼬물 만드는 내 모습이 보기 좋았고, 4학년까지 배웠던 지식이 쓰이지 않아 불안했다. 복잡한 회로를 그리고 싶어도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은 랩실 장비로는 힘들었고, 5명이 붙어서 만들어야하는 회로는 결국 한명이손기술이 좋아 다 만들어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공부지 연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일찍 깨달았다.

그치만 다음 스텝이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25살 평생 해본적이 없던거라 그만둔다라는 선택지는 아예 없었다.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많아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나는 겁쟁이라 한가지에 몰두해 본적은 없다. 성공보다 실패를 걱정하고 항상 퇴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25살엔 퇴로를 만들 생각을 못했다. 그래서 버티었다. 꾸역꾸역.. 회피해버렸다. 

코로나가 시작된지 1년이지나고 나니 슬슬 친구들이 취업했다. 인스타에 보이는 그들의 주말은 행복한 일들로 가득해 보였다. 그렇게 쉬어도 쉬는게 아닌, 주말에도 나가야하는 것이 당연한 랩실에서 내 가치관은 흔들렸다.

나만의 규칙은 랩실 공통 규칙인 주말출근에 적응하지 못하는 남과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주었고, 나만 잘하면 되는게 아니라 잘하는 것으로 보여야하는 것, 하나뿐인 상사에게 밉보이지 않아야하는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 

<23~24> - 코로나로 인한 계획 무산, 그리고 대학원 진학...!

코로나로 인해 취업준비를 하려던 24살은 생각없이 대학원생을 모집하는 신임 교수님께 면담을 넣었고, 쉽게 얻은 기회라 큰 기대 없이 남들은 취준으로 고통받을 때 편안하게 지냈다. 단순히 지금 당장은 고통받지 않고 대학원에 가면 더 좋은 회사에 좋은 자리에 갈것이라는 기대로 부풀었었다. 

코로나로 인해 얕게 알게되었던 사이는 다 멀어졌고, 친구를 만나는 것이 힘들어져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면서 나의 외로움을 채워왔는데 그것이 막히니 깊은 관계 몇만 남아 버렸다. 상실감이 컸고 인간관계를 잘 못한거 같았다. 카카오톡의 친구수는 많지만 실제로 연락하는 것은 뚝 끊기고 단체톡은 있지만 개인톡이 몇개 없다는 것을 알고나니 너무 외로웠다. 

개강하고 밥먹자는 약속, 어디 가고 싶은데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하지 못하고, 동아리도 온라인으로만 모집하니 친해지기 힘들었다. 해외여행을 갈 수 없고 모든게 다 멈췄다. 

 

<22> -호주 교환학생과 여름인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고등학생때부터 어느 대학교 어느 과를 가든 나는 교환학생은 꼭 가고 싶었다. 그래서 3학년 1학기 호주로 떠났다. 내가 호주에 대해서 아는 것은 캥거루, 코알라, 시드니오페라하우스가 다였다. 그랬기 때문에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7개월간의 호주 생활은 너무나 행복했다. 후텁지근한 날씨, 4월의 미세먼지가 없이 푸른 하늘, 친절하고 여유넘치는 사람들, 나이를 물어보고 존댓말을 쓸지말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언어, 바다가 가깝고 휴대폰보다 아날로그로 놀면서 친해질 수 있는 분위기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적당히 한국인들과 교류하고 같이 교환학생 온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도 친해지고 호주 원주인들과도 친구가 되어 여유롭고 좋은 환경의 삶이란 이런것이구나 서울에서만 살던 난 알을 깨었다. 

특히 계속 학생으로서 공부해서 좋은 회사 취직하고 결혼하는 암묵적인 적정시기와 적정루트를 밟아야한다고 생각했던 편견이 조금씩 깨졌다.  28살인데 저렇게 여행다니면서 알바를 한다고? 30살인데 이제 알바를 하며 영주권을 준비한다고? 그럼에도 그들의 얼굴은 웃음과 행복으로 가득했다.

나는 저렇게도 살아지는 사람을 실제로 보고 나니 나도 어떻게든 살아도 되겠구나를 마음깊이 깨달았다. 말로 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정말 다르다. 호주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스쳐가는 인연이든 꾸준히 연락하는 인연이든 그들은 나에게 너무나 넓은 세상을 보여주었고 그들이 보여주는 세상이 좋아 나는 22살 이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 즐거워졌다. 

<유년기~ 21살> 무난한 학창시절, 동아리, 알바, 해외여행 성인은 즐겁구나

부모님의 지원 덕분에 초등학생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고, 그 덕분에 나는 문과로 진학하려 했다. 중학생때는 외고를 준비했고, 고1까지는 문예지부에 모든 글쓰기 대회, 책 많이 읽어서 생기부에 쓰는 것은 기본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모든 과목을 좋아했고, 그저 이과가 취업이 잘 된다는 말에 이과로 진학하게 되었다. 

학창시절엔 사교적인 학생은 아니었다. 혼자가 편했고, 항상 학교에 대해 얘기하고 가정통신문을 보여줬던 난, 동생이 초등학교에 진학 후 학교에 대해 얘기하는 이후부터 부모님께 말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나만의 속도로 가는 것을 좋아했고 두손이 자유롭고 내 시야가 틔어있길 바랐다. 먼저 다가가는 타입도, 친구가 많지 않았다. 중학생때도 고등학생때도 무조건적으로 어느 무리에 속해있으려거나 어딘가를 같이 가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해야하는 것을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런 것들은 대학교 진학하면서도 고민이었고 더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지역의 꿈을 가진 사람과 만나다보니 조금씩 괜찮아졌다. 나에게 인간관계는 학습의 영역이었고 감사인사도 좋은 말도 다 외워서 했다. 내가 받은 친절을 기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모방했다. 

 

하고 싶었던 오케스트라, 천문동아리를 하며 주말에는 서빙, 학원, 캐셔, 주방보조 등의 알바를 하며 돈을 모았다. 21살 여름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다니며 한글이 안통하고 공기가 다르고 수목이 다른 피부로 와닿는 색다름을 경험했다. 세상이 넓구나를 눈과 귀와 피부로 느낀 순간 20년간 한국에 살았으니 남은 삶을 해외에서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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